6나는 제사가 아니라 사랑을 원하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호세아 6장 6절루아흐 정역
예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주일을 성수하고, 성경을 잘 알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공부를 합니다. 틀에박힌 것 같은 종교생활들은, 본질은 아니지만 본질로 인도하는 ‘역설적인’ 도구나 수단입니다. 그 활동 자체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활동을 통해서 얻어야할 본질이 더 중요합니다.
본질에 다다르면, 실상 하나님이 규칙적인 예배나, 틀에박힌 종교활동과 전혀 상관없는 분이심을 알게됩니다. 그렇지만 규칙적인 예배와 틀에박힌 종교생활을 완전히 도외시하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도구나 수단들의 목적을 달성해야하는데, 도구나 수단이 목적을 대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와 여러가지 훈련이 지향하는 바를 잊어버리고, 그것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그런 활동들의 요지인데,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갔다는 느낌은 일방적으로 막연하게 가져갔으나 실체는 없습니다. 너가 어떻게 알고 남을 판단하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겪은 사람은 겪지 않은 사람들의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헛된 소동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느낌이 아니라 상호간의 실재입니다. 지적이해가 아니라 인격적 관계입니다. 분명 여러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렴풋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겸손함으로 내려가는 주권양도의 전환점으로 삼지 않았던 것입니다. 회개를 했으나 구색만 맞췄거나 허울만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을 바꿔보려고 섬세하게 주님을 알아가며 여쭙고 신중하게 살아가기를 오랜시간 직감하면서도 고의적으로 거절하며 지낸 것입니다.
왜 직감된 것을 오래도록 거절하고, 다시 반복하지않아도 되는 초보적인 종교활동의 훈련을 반복하는지 아십니까? 실상 하나님께 가치관념의 무게를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일들이라 속단하고, 인생을 섭리하시는 주님께 주님이 알려주신 방법대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열심에 응원해주시길 바라는, 주님이 가끔 행운처럼 느껴지길 바라는, 그런 욕심에 치우친 미신을 신앙이라고 관철하기 위해, 의논이 아니라 울부짖고, 주님의 선악의 기준을 알아보려함이 아니라 기분좋은 찬양만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고가의 전자제품을 사고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는 세심함으로라도 주님을 향하여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반드시 맛볼 것입니다. 자신의 방법이나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 결코 아니라는것을, 막연한 종교활동과 반복되는 떼창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반드시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도외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하여 선용하도록 만드는 주님의 진짜 친구들이 되십시오.
5수금 소리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노래하고, 다윗처럼 악기를 만들어 낸다.
아모스 6장 5절루아흐 정역
13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리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의 명령을 배운 것에 불과하다.”
이사야 29장 13절루아흐 정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