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오, 하나님의 부와 지혜와 지식의 깊이여! 그분의 판결은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길은 찾아낼 수 없다.
로마서 11장 33절
완벽한 판단은 인간에게 없다. 또한 우리의 삶에 앞으로도 없다. 선을 찾아서 행한다는 것은, 가시적인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판단의 기준을 우리에게 둔다면, 우리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서도 우리가 예상하게 된다. 우리 보기에 선한 결과더라도, 궁극적으로 선인지, 인간적인 선악의 기준은 매우 모호하다. 선악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공의는 베풀어주셔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베풀어달라는 간청의 모습을 순종으로 정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순종이 없다면 부르짖음도 간청이 아니다. ‘인간적인 열심’이라는 단어는, 행동양식의 근거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열심’은 부르심에 합당한 행동이 되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다. 이 적용은 개인적인 큐티로 피상적인 착상에 근거해서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의 해석이 떠오르기까지 겸손한 마음으로 예의주시하여, 때에 맞는 유일하고도 무오한 성령님의 판단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성령님의 판단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아 알게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기쁨이 되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을 따라갈 때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의 성취에 대해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러면 순종도 수단이 되며, 순종의 대상이신 하나님도 거래상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행동의 변화 이전에 존재의 변화이다. 순종의 행동이 아무리 반복되더라도 자기본위적인 마음이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의 순종은 언젠가 끝이 있다. 그러나 순종의 존재가 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행동에 있어 완벽한 성화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항상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인식이 있다. 부분적인 불순종 속에서도 아버지를 기대하며, 괄목할만한 커다란 순종의 성취 속에서도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깊이 낮춘다.
순종의 존재가 된 것은 아버지와 자녀 당사자만 공유할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의 비밀이다. 당신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순종의 존재가 되었는가? 성경 여기, 저기를 부분적으로 갖다 적용하여 이러저러한 행동양식의 변화가 순종의 궁극적인 열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음의 변화,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을 인간에게서 더 이상 찾지 않고 우리를 피로 사신 예수님께 붙어있으려는 것, 그것이 순종의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로서 어디서나 복의 근원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이미 정해진 승리의 십자가를 확신에 찬 어깨에 짊어지고, 삶을 견뎌내며 예수의 이름으로 사랑을 아낌없이 흩뿌리는 삶, 이것이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온전한 삶이다. 사랑을 흩뿌려라, 맛을 내고 어둠을 밝혀라. 개인적인 거룩만을 탐닉하며 타인과 나를 구별하려는 소극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래된 소금과 같이, 건전지가 다 닳은 후레쉬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주님의 뜻을 확신하게 되면 어떤 삶의 정황 가운데서도 불굴의 용기가 생길 것이다.
24여호와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아, 마음을 굳세게 하고 용기를 내어라.
시편 31편 2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