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35절
심판, 지옥, 이해타산에 관련된 미래의 막연한 길흉에 대한 염려로 회개를 유도하는 설교가 많아요. 우리는 처음엔 순박하여 여러 협박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협박이 주는 두려움에 의한 극기로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들었던 설교들에 하나님에 대한 날조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돼요.
그러나 이전의 회개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기란,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많은 기독교인이 회개를 일으키시는 진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극기와 결심으로 마음에 없는 눈물을 쏟아냈기에 왜곡된 신앙이 자존심과 체면에 얽혀 공고해져 있어요.
윽박지름 앞에 굴종하며 시작했던 신앙생활, 이해타산적인 염려로 시작한 신앙생활은 필연적으로 기득권에 집착하게 돼요. 공동체에 입문한 모든 타인이 상냥한 친절과 무서운 협박성 설교의 모순에 혼란스러워하며 두려움에 굴종하는 모습이 되는 것을 봐야만 하겠다는 보상심리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을 신중하게 만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이렇게 복잡다단한 모순 속에서 상냥했다가 잔인해지기를 반복하며 살아가요. 그러한 모순을 자각하는 사람 중에는, 그러한 모순의 원인을 규명하려 과도하게 귀신을 들먹이거나 마귀의 방해를 과도하게 대입시키며, 정상적이지 않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성경을 올바르게 대우하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어요.
세속적인 직업이 되어버린 목회자 그룹의 사회적 권위에 압도당하여 그들의 성경 해석을 여과 없이 무조건 신뢰하는 데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고 발전되었어요. 한낱 시장의 양산품을 사더라도 하자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들을 때에는 신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민망해야 해요.
계산적으로 합리적인 말들, 이해타산에 맞물려 사람들의 욕심을 자극하다가도 헷갈리도록 감성적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말들이 성경을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모두 용납되어 왔어요. 실상 길흉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이면과 표면을 달리하여 과도하게 생존하도록 만든 많은 설교가 너무나 용납되어 왔어요.
정말로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세상의 이해타산적인 모든 관념을 망각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랑의 압도예요. 조물주가 피조물로 인하여 슬퍼하시기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해야 해요. 우리의 여러 모습이 하나님을 아프게 해 드린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해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상처가 어떤 상처인지를 발견할 때에야, 막연하고 비논리적인 두려움으로의 결단적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민망함과 미안한 마음으로의 자발적 회개로 이어져요.
주님이 주시는 회개는 인격적이고 자발적인 회개예요. 주신 사랑을 발견하고, 주신 분에게 심각한 냉소와 잔인함으로 일관했던 자신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가증히 여기며, 스스로 개선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하나님께 엎드리게 돼요. 성령님은 그렇게 엎드린 흙들에게만 다가오셔서 다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