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우리나라 사람의 특성 때문에, ‘사랑하라’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의 건전한 형식이 무엇인지를, 혹은 그 깊이를 생각하기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자기 생각들을 욱여넣는 것을 좋아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급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참음’이야말로 사랑입니다.
혹 성미가 급하고 말의 서두만 읽으려는 우리의 성질로 인해, ‘참음’이라는 개념을 섣불리 판단하고 넘길지 모릅니다. 누가 누구에게 오래 참는다는 것을 대부분이 이해하기로는, 가장 크게는 ‘화를 참는다’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보려는 사랑의 척추와 같은 ‘참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 ‘저게 언제 용서를 빌러 오나 보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참는다고 말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노를 품는 것입니다. 화를 참는 것입니다. 참다 참다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용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하신 것에 미움을 예비해 두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인 우리에게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의 참으심은, ‘언제 용서를 빌러 오나 보자’가 아닙니다. ‘내가 이미 용서했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라는 것을 용서를 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회개는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용서 앞에서, 용서해 달라고 비는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우리와 같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우리의 죄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인치신 ‘의’를 향하여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 죄를 지었는데 어떡하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베푸신 용서는 ‘죄짓지 않음’이라는 소극적인 구원이 아닌, ‘의를 행함’으로 친교를 누리시길 원하는 아버지의 기다리심입니다.
14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편 1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