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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목사

7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3장 7절

여성 안수 거부가 문제되는 것은, 여성을 목사로 삼지 않는 문제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사람들이 자신들이 분명히 억눌려 있고, 교회의 기형적 권위주의를 겪고는 있는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모호하다가 누군가 뜨거운 감자를 던지면 그것을 덥석 무는 것입니다. ‘아하 이것 때문이었구나!’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변질된 권위주의적 구조는 기형적입니다. 하지만 그 기형적인 권위주의적 구조를 가져온 것은 설교자에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책임은 성도에게도 있습니다. 목회자를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한 번, 두 번 대접을 받으면 섬김의 직분을 권력을 행사하는 직분으로 오용하는 모습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가 목회자를, 목회자가 성도를 ‘견제’하는 질서로 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오래된 풍조와 역사적인 흐름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해주는 공동체로, 성도가 목회자를 존경한다면 목회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말씀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성도의 할당 분량을 잘 전달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말씀에 ‘올바르게’ 근거하지 않은 교회 질서의 설계가, 성도들로 하여금 목회자의 권위에 억눌려 있도록 했습니다. 진정 말씀 안에서의 관계는 자유로워야 하지만, 휘두르기 쉬운 권위에 의존한 목회는 성도가 목회자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는 불구가 되게 했습니다. 그 오래된 영적 불구 상태의 고통 호소들이 기형적으로 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사 한 사람이 던진 뜨거운 감자를 덥석 집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성 안수 거부라는 주제의 논쟁거리가 올라오는 것이 여기저기 빈번히 보이는 아침입니다. 그런 발언을 덥석 찬동한다는 것이, 마치 우리가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는 목사가 아닌 박사의 권위에 스스로 매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주님이 아닌 사람의 말에 찬동하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에게 좌지우지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교회가 목사라는 직분을 ‘직분’이 아닌 ‘권위’로 만들었기 때문에, 잘못된 논쟁거리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직분 제도가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인 것입니다. ‘차별’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충동할 뿐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역할의 구별은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에서의 목회자의 역할을 남자가 담당했을 뿐입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남자를 목회자로 세웠지만, 그 근거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위주의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권위는 희생에서 오지만, 사람의 권위는 이기적 이해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아내 역할을 하고, 남자가 남편 역할을 하듯이 교회에서 남자가 목회자를 하는 것도 역할의 올바른 성경적인 배치입니다. 성경은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가 여성 나름의 본성을 잘 살펴서, 스스로 말씀 안에서 목사라는 직분을 ‘지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남성에게만 목회자 직분을 주는 것, 여자를 차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교회의 구조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설계하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남자답게’ 섬길 수 있도록 배치하신 것입니다. 여자는 본래 약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직분이라는 뜨거운 음식을 유리그릇에 담지 않으시는 이유는, 단지 유리그릇을 아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남자가 아내 될 수 없고, 여자가 남편 될 수 없듯이 말입니다.

5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신명기 22장 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