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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을 이끌어 가시니

짐승을 이끌어 가시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장 19절

하나님이 첫째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가 창조세계를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경작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바드는 ‘섬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실상 에덴동산은 이미 하나님이 모두 경작해두신 상태이기에, 아담은 경작한다기보다 동산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께서 처음 맡기신 일은 각종 들짐승에게 이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신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시며, 두 번째 안식의 낙원을 섬기시는 분으로 완전히 세워지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무슨 일을 시키십니까? 마찬가지로 짐승에게 이름을 주는 일을 시키십니다. 첫째 아담에게 짐승들을 이끌어 오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예수님께로 짐승들을 이끌어 오십니다.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39절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아시고 “내게 주신 자들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짐승입니까?
맞습니다. 우리는 짐승입니다.

20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편 20절

시편 49편을 근거로, 우리는 짐승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생명의 속전을 치르셨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49편의 맥락상 나는 짐승이 아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깨달은 자는 짐승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깨달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정말 만나서 깨달았는지를 시편 50편은 묻습니다.

21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편 50편 21절

시편 50편은, 짐승 같은 자가 언약을 입에 두더라도 형제를 공박하며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고 있다면 짐승과 다름이 없으며, 하나님도 자기와 같은 줄로 아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생명의 속전을 치르셨다는 지적인 깨달음만으로는 예수님이 이름 지어주시는 은혜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스스로 짐승임을 인정하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로 나아가야만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죄를 이겨낼 수 없고 짐승과 다름없이 죄악의 종노릇하고 있음을 슬퍼하며, 둘째 아담에게 슬피 기어가는 짐승을 자처할 때, 긍휼을 입고 새사람이 됩니다.

예수께서 이름 지어주신 짐승, 즉 새사람을 입은 성도는 죄를 이기도록 섬겨주시는 예수님의 섬김이 삶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은혜로 말미암아 삶이 예배가 됩니다.
짐승 같던 내가 조금씩 사람이 됩니다.
어쩌다 다시 짐승의 모습이 되게 하는 내 마음의 죄악을, 예수님께서 발꿈치로 세게 밟아주십니다.

예수님이 아직 섬겨주시지 않는 사람은 온전히 짐승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 죄악을 다스려주시고, 죄를 이기도록 섬겨주셔야만 우리는 추악한 짐승이면서도 새사람을 입고 사람 대우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 섬김을 받는 복된 짐승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이 세상의 아담으로 삼으사, 우리와 같은 짐승을 한 사람 한 사람 예수께로 이끌어가십니다.
그가 이름을 지어주시고 길러주실 때, 그제서야 짐승 같던 내가 사람으로 살아가며, 완전한 사람이 되는 그날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사도행전 10장 11-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