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26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잠언 29장 25-26절
우리는 특정 사람들을 향한 권리 얻기를 좋아합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불릴 수 있는 관계들은 종목대로 서로에게 모종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결핍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기도를 사람에게 하듯이 살아가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결핍을 채워주는 하나님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지할 만한 대상들은 일시적인 편안함을 줍니다. 그래서 비교적 더 오래, 더 수준 있는 편안함을 느끼기 위해 친구를 취사선택하기 시작하며, 나아가 편과 당을 짓고, 관계적 성벽을 구축하여 여러모로 안전을 도모하게 됩니다.
결핍된 존재들이 서로 의존하기 위해 손잡고, 그것을 아무리 사랑으로 포장해도 실상은 서로를 소비하는 관계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더욱 편리하게 서로를 사용하기 위해 기득권을 보장하는 왜곡된 규율이 생기고, 그러한 규율은 약한 자들을 억울하게 하는 편법의 사용을 보장해줍니다.
점점 이러한 것들은 세상의 이치처럼 굳어지고, 사람들도 이 이치 속에서 경험을 쌓으며 노련해집니다. 세상은 사랑이 거할 자리가 없습니다. 모두가 죽음과 같은 각자의 결핍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며 헛되이 소동할 뿐입니다.
새 것이 없는 해 아래의 결핍된 인생은 이렇게 사람으로 하늘을 소망하게 만듭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도 무릉도원, 천당, 용궁, 윤회 등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의 결핍을 반증합니다. 만물은 피곤에 휩싸여 있으며 점점 혼돈과 공허로 나아갑니다.
막연한 내세의 소망은 단지 현실의 헛됨에 대한 도피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내세의 소망은 현실도피적인 막연한 소망이 아닙니다.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었기에, 지금의 혼돈하고 공허한 삶도 창조적인 삶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내세의 약속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선취를 삶 속에서도 누리게 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에 소망을 두는 것이 우리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세의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은 믿지만, 내세의 선취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은 믿지 않습니다. 삶 속에서 천국을 누리게 하시는 선취의 삶을 거부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말고 아직 많은 자녀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애써 모른 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를 구원해주신 것은 감사하나, 그 구원의 이유를 듣다 보면 무엇엔가 얽매일까 두려워하는 비열한 마음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진중하신 하나님을 피할 뿐 아니라, 그분을 지루해하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죽어가는 영혼을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아멘 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울고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빚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항의합니다.
점차 나를 훈련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간청은 세련되게 외면되고, 개인적인 구원은 마치 천국의 빵집에서 ‘안전빵’으로 따로 챙겨둔 것처럼 여겨집니다. 구원받았다는 안연함으로, 하나님을 정도껏 사랑하는 나를 옳다 해주는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둡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다가는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릴까봐 조심스러운 사람들. 그런 이들이 일시적인 만족을 위해 사랑하던 세상은 반드시 그들에게 ‘소비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순간’ 잔인할 정도로 내팽개칠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 무언가를 깊이 의지한다면, 그 배후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하려는 우리의 작은 마음을 도둑질하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24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29장 2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