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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대상이 아닌

의지의 대상이 아닌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태복음 18장 21절

베드로가 이렇게 질문하기 이전에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권고를 받아들인다면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권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개선하겠다고 할 때에만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도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장 22절

예수님은 회개하며 죄를 뉘우치는 형제의 번복된 회개를 무한히 받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의 많은 신앙생활은 죄를 가만히 용납하고, 서로의 죄에 눈과 귀와 입을 가려 주는 것을 사랑과 오래 참음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주님이 주신 믿음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는 자주 죄짓는 자들의 삶이 기준이 되어 하향 평준화되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거룩을 지향하는 인격적 장소입니다.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린도전서 15장 34절

올바른 선악의 기준 없이 각자가 스스로 기준이 되어 서로 간섭받지 않으려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 감이 없기에 자신이 날마다 죄의 유혹에 취약한 존재임도 자각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죄를 용인하여 선악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고, 명백한 선행을 더럽히는 자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18장 22절

예수님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라 하신 말씀은, 죄와의 싸움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요청입니다. 우리는 대개 죄와 잠깐 분투하다가 유혹이 거세지면 타협하고 정당화합니다. 상황이 불리하면 타협하고, 손해가 예상되면 순종의 기준을 회피합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죄와 무한히 분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체가 참으로 교회라 불릴 수 있는지는, 죄와 무한히 분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무한히 분투하며 주님의 용서하심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주님 없이 서로 간에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심 받은 형제 중 누구도 의지의 대상이 될 만큼 유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신뢰와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로 포개져 주님의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하는 지푸라기들입니다. 모이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이 거세지도록 함께하기 위함이지, 사람을 자랑하고 의지할 인물을 찾기 위함이 아닙니다.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서 12장 4절

9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편 62편 9절

2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시편 146편 2-4절

용서는 죄를 용납함이 아니라 회개를 전제로 한 거룩의 회복이며, 우리는 서로를 의지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죄와 끝까지 분투하며 오직 주님의 용서와 인도에 의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