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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코의 금보석

돼지코의 금보석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누가복음 11장 26절

옛날에는 만화, 영화, 게임을 단순히 재미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더 이상 단순한 ‘문화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선한 습관을 무너뜨리고 성경적 세계관을 잠식시키는 벌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만화나 영화는 그 세계관에 심취하는 동안 우리를 교육합니다. 보는 이 누구나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게 됩니다. 우리는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다가도, 가벼운 취미생활로 예배의 여운을 망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예배가 끝나면 곧장 영화를 보러 가거나, 먹을거리로 마무리하지 않습니까? 그것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의 안식은 그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문화생활’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비틀어 놓습니다.

예배의 거룩한 분위기와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해졌다고 느끼는 그때, 그 속에 예수님께서 좌정하지 않으시면, 쫓겨났던 악한 영이 더 사악한 것들을 데려와 거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좌정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묵상·기도가 반드시 말씀이 요구하는 자세로 ‘파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다음에는 악한 것들로부터 더러워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며 잠잠히 인내해야 합니다.

옛 교회의 전통을 되새겨 봅니다. 주일의 각종 소비 활동을 금하던 선배들의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지금 세상은 쉴 새 없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스마트폰은 잠시도 우리를 놓지 않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발걸음을 수시로 붙잡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되는 아름다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둘 많은 기회를 세상에 빼앗겨 분별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워도 분별력이 없으면 ‘돼지 코의 금고리’와 같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는 선택지보다, 세상을 선택하게 하는 선택지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세상은 노골적으로 우리를 현혹하며 중독되게 합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경계하려 하면, “자유로운 문화생활까지 건드리느냐”는 반박이 돌아옵니다.

문화의 다수결을 따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을 붙드시겠습니까?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길로 가는 자가 많습니다. 말씀은 분명히 세상을 거부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악하다고 증언하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21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22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잠언 11편 21-2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