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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장 2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전까지는, 사실상 신앙생활의 패배자였습니다. 그는 인생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하셨지만 끝까지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사라를 누이라 속였으며, 하갈과 동침했고,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웃었으며, 아내 사라도 함께 웃었습니다.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세우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삭을 주셨던 하나님은 약속을 결코 어기지 않으시며, 그분의 뜻을 아브라함에게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상한 마음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우상처럼 ‘희생을 요구’하시는 방식으로 그 마음을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우상들은 사람의 목숨을 바치는 제사를 드리게 했지만, 하나님은 숫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진심을 확인하시고,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며 그의 패배의식을 어루만지셨습니다.

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한복음 5장 4-5절

요한복음에는 아브라함과 닮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는, 먼저 들어가야 낫는 그 못에 단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패배자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는 앉은뱅이였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이 세상의 경쟁 구조를 상징합니다. 먼저 들어가는 자만 낫는, 즉 더 빠르고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만 살아남는 세상. ‘출세’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짓밟으며 나아가는 그 구조는 결국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우상숭배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 병자에게 보여주신 구원은 세상의 방식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며,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자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주님은 경쟁에서 이긴 자가 아니라, 패배자와 상처 입은 자 곁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세상의 잣대로 실패한 인생처럼 보여도, 주님은 결코 그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먼저 들어간 자가 낫는다” 하지만, 주님은 “내가 네게 가겠다”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방식입니다.

수능시험이나 인생의 수많은 경쟁 속에서도,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짓밟는 소용돌이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정한 순서와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거나 낙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을 세상의 잣대로 오해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기뻐하실 것이라 착각하며,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보다 우리의 신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아브라함과 38년 된 병자처럼, 수십 년 동안 상처와 실수 속에 살아온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낙심과 좌절,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평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경쟁의 안식이 아니라, 실패 속에서도 우리를 안아주시는 사랑의 평안입니다.

11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전도서 9장 11절

하나님이 주시려는 평안은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마음의 안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