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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처사

당연한 처사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지 말로만 자기를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록되기를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하였으니, 자신의 행동이나 성취 자체를 의식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분은 한 분뿐이시니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자신에게는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자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였다면,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대신 살아주신 일로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보아스를 보십시오. 그는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온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놀랐습니다. 타인의 눈에 그렇게 보일 만큼의 삶을 살았음에도, 룻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고, 더 나아가 이삭 줍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선행에 조금만 열심을 내도 마음속에 금세 보상 심리가 차오르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한 채 지내지 않습니까. 심지어 사랑을 하고서도 대가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마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10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마태복음 8장 10절

이 장면은 마치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태도에 놀라신 것과 같이, 보아스가 룻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 있습니다. 성경은 오묘하게도,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오히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을 통해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다윗에게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을 통해 경종을 울리시고, 예수님을 시험하던 율법교사에게는 강도 맞은 자를 도운 사마리아인을 본받으라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으로 수많은 백성을 잃었으나, 오르난은 재앙 앞에서도 자신의 아들들을 지켰습니다. 율법교사는 군중 앞에서 자신의 지식과 의를 드러내려 했으나, 예수님의 비유 속 사마리아인은 누가 자신을 보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을 온 힘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여겨지는 이들 가운데서도, 오히려 사랑을 알고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는 말씀도 예배도 없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행동을 하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도 있고 예배도 있으며, 선한 사업이라 불리는 많은 활동들 속에 있으면서도,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생활과 여러 사역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근거가 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사랑을 느끼시지 못하신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온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