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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진드기

살인 진드기

24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마태복음 23장 24절

구약의 옛적부터 참된 목자의 지표는 그들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세나 사무엘 등, 그들이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결백함을 호소하는데, 그들은 소나 양이나 어떤 가축 한 겨리도 취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자세를 낮추었다가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맹수들과 같습니다. 비교하기 좋은 벌레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살인진드기입니다.

살인진드기는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아주 작지만, 한번 물면 스스로는 제거할 수 없도록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 자리에서 사진의 모습과 같이 피를 빨며 크게 부풉니다. 지역교회도 마치 그 자리에 철썩 달라붙어서 저렇게 거대해져만 가는 모습들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보이는 것을 더 중요시합니다.

“모기에는 긴장하고 낙타는 삼킨다”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극소량의 피도 모기에게 빨리기 싫어하지만, 교인들의 헌금은 집 한 채씩 넙죽넙죽 받아먹는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인들의 형편을 살피지도 않고 큰 부담을 쉽게 부가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삯군이기를 자처하는 교회의 모습은 교인뿐 아니라 그 지역을 좀먹는 병폐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죄책의 해소’라는 마약을 판매하는 마약상과 같아진 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마음껏 죄를 짓고, 예배를 통해 자기 멋대로의 후련해짐에 익숙해진 지 오래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동서남북으로 교인을 구하다가 그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 하신 것과 같습니다. ‘죄의 용서’는 죄를 아파하고 점점 미워하나, ‘죄책의 감정적 해소’는 극한 방종과 같습니다.

계명이 아닌 것들, 말씀에서 유추하지 않은 것들을 ‘믿음’이라는 것에 억지로 결합시키는 것이 ‘이신칭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부패했던 카톨릭은 눈에 보이는 성지나 성자들을 만드느라 혈안이 되었었는데, 지금 기독교도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적’이기를 자처하기 시작하면서 현상 유지와 마케팅을 위하여 성지와, 받들어야 할 성자들을 모시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향하여 할 말을 꼭 하셨어야 했던 이유는, 유대교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칭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즉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칭하는 종교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은, 저들이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추천하는 자기들의 모습과 결코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둑질하지 않으십니다.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장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