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폰트 크기
보통 16px
감정표현

감정표현

면밀하게 읽으면, 시편은 수많은 시를 모아 하나의 격언을 만들었고, 잠언은 수많은 격언을 모아 한 편의 시를 만들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위의 시편 구절은 시편 전체를 결론짓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생의 눈물들을 한 편 한 편의 시로 이어 나열하다가 결국 “인생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는 격언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위의 잠언 구절은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을 수많은 격언과 단락으로 기록한 뒤, 그 모든 삶의 중심에 있는 ‘여호와 경외’가 하나님 보시기에만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하며 끝맺습니다.

시편이 하나의 격언으로 마무리되고, 잠언이 하나의 시적 표현으로 마무리되는 이 구별된 뉘앙스는, 주님 안에서 우리가 사람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 한 편에도 눈물을 펑펑 쏟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사람 앞에서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인생의 많은 사건들이 십수 년 모여야 겨우 한 방울의 눈물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과 잠언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글쓴이들의 기질에 따라 구별되었듯이, 신앙생활 속에서도 사람의 감정 표현은 서로 다릅니다.

저는 아내가 하나님의 명확한 돌보심을 경험하고도 기뻐하거나 감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당혹스럽고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언쟁이 되면, 특정한 감정적 반응을 “보여 달라”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각자의 감정 표현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성역(聖域)’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성역을 존중하지 않는 종교생활을 오래 해왔습니다. ‘기도는 울부짖어야 한다’는 형식을 주입받기도 했고, 마음에 이입되지 않는 슬픔을 강요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신앙은 사람을 찍어내는 제빵공장처럼 변했고, 다양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동일한 패턴을 보여야만 “경건하다”고 평가되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사람 사이의 자연스러운 인격적 갈등을 통해 자라나는 성숙이 교회 안에서는 애초에 부정되거나 소멸되어버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가족처럼 다투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며, 미워했던 이웃이 형제가 되어 가야 했는데,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같은 감정을 갖게 하고, 같은 형식에 젖게 했습니다.

화내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었고, 이미지 관리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펑펑 쏟는 눈물이 모여 겨우 한 번의 순종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차곡차곡 쌓이는 순종이 모여 겨우 한 방울의 눈물이 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됩니다.

성경을 면밀히 읽어야,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기다리시는 기간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100% 내 마음에 꼭 맞아 평생 교감이 가능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받는 실망을 하나님께 가져가 만족으로 교환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0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잠언 14장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