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적 만족은 유토피아일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말은 세상을 나무에 비유했을 때 그 뿌리가 물질을 우선으로 둔다는 뜻입니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돈으로 사람도 감정도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은 자본주의 사회 최상층의 엘리트로 등장합니다. 그는 대기업 사장의 아들로 회사 업무에 적응해가는 엘리트이며, 주변엔 동일한 계급의 친구들이 무리 지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복제인간처럼 최신 최고급 수트를 입고, 때로는 상표까지 같아 보입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명함 한 장의 디자인이나 스타일이 앞서면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집니다. 영화는 바로 그러한 엘리트 집단의 마음 상태를 패트릭의 내면을 통해 보여줍니다.
패트릭은 동급 동료 중 누군가 자신보다 앞서간다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의 가치 기준은 전적으로 물질과 외형에 놓여 있으며, 그로 인해 자본주의적 경쟁 속에서 생긴 열등감이 그를 지배합니다. 그는 반드시 추월하고 인정받아야 하며, 남보다 더 세속적이어야 한다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 욕망들은 그를 더욱 꾸미고 세련되게 만들지만, 결코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그에게 결핍을 주고, 그는 그 결핍을 자본주의적 콘텐츠로 채우려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포르노를 보아도, 약혼녀가 있음에도 바람을 피워도, 마약을 해도, 수많은 창녀와 관계를 맺어도 그의 결핍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자본주의적 콘텐츠가 불러오는 극단적 귀결은 살인이라는 비상식적 행위까지 이릅니다. 그는 살인이 무언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라 믿습니다. 친구를 도끼로 찍었을 때 잠깐 결핍이 해소되는 듯 느꼈지만, 이는 일시적일 뿐 결핍의 본질적 원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착각은 이어지는 살인과 공포를 낳고, 결국 살인조차 결핍을 채우지 못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백하려 하지만, 현실에는 그런 살인 사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많은 행위가 그가 상상 속에서만 한 일들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홀가분해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독백은 그가 결핍을 끝내 채우지 못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실제 살인이 아닌 상상의 살인으로 인해 결핍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상태가 그 대사에 드러납니다. 그는 여전히 진짜 살인을 하면 결핍이 채워질 것이라 믿고, 욕망의 끝을 보기 위해 실제 행위를 할 수도 있음을 내비칩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넘치는 물질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결핍을 느꼈을까요? 그 무언의 결핍은 무엇이며,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관점에서는 결핍은 ‘결핍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결핍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즉 진정한 분별력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천국과 같은 만족의 콘텐츠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닮은 본연의 모습이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는 진정한 낙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스스로 분별할 수 없습니다. 무언의 결핍을 깨닫고 분별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라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이라는 바다 위 돛 없는 배와 같고, 하나님은 그 배의 돛이 되십니다. 이미 바다와 바람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정하신 돛 이외에 우리는 세상의 파도 가운데서 멀미 없이 항해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