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교제를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교제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교제 속에서 상처를 받거나, 서로 싸우고, 의견이 충돌하여 괴로워하며, 서로 권태 속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서로 사귀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하기를,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는 세상의 본대로 ‘자연스럽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 속에서,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에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습니다.
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창세기 18장 12-13절
사라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를 듣고 속으로 웃습니다. 불가능한 얘기를 듣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윗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하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을 업신여겼던 미갈처럼, 사라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아브라함의 말을 업신여깁니다. 사라의 영적 수준이 그 정도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느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벗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라에게 전수해주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라에게 영적인 성장을 전해주지 못한 것입니다. 이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사건 이후, 아브라함과 사라가 따로 살게 되었음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창세기 22장 19절
2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창세기 23장 2절
이 두 구절 속에서,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거하고 있었고, 사라는 기럇아르바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곳으로 ‘와서’ 울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삭 사건 이후 두 사람의 거주지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서로 교제하는 신앙인들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교제를 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본대로 연애하고, 세상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사라와의 분리가 사라가 이삭 사건을 이해할 만한 영적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는 사실을, 엄마인 사라는 납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분리는, 영적 소통의 부재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의 영적 소통을 경히 여겼음을 오늘 말씀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교제를 통해 서로의 관계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갈등이나 문제가 닥칠 때 서로를 원망하고 힐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을 줄 아는 것이 신앙 안의 교제입니다.
신앙 교제의 소홀함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분리를 가져왔다는 것을 오늘 알 수 있었습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서로를 통해 채워주실 행복을 기대하며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제 사이에 조언하시고, 즐거움을 더하시며, 기쁨으로 함께하실 것입니다.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