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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수단의 구별

본질과 수단의 구별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3절

수단과 본질이 주객전도될 때, 인격적이었던 관계는 이해타산적 관계가 됩니다. 이해타산의 관계는 감정, 물질, 모든 면에서 손해와 이익을 낱낱이 따지는 관계입니다. 사람 간의 이해타산적 관계는 매우 불편하지만, 우리는 사회 안에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강요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이해타산적 관계에 빠지는 실수를 범합니다. 이는 세상에서 체득한 ‘경험적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어보려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이해타산적 관계가 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도 나를 수단으로 대하신다”라는 잘못된 오해에서 생기며, 동시에 나 역시 하나님을 수단화하여 내가 원하는 세상의 것들을 내 삶의 본질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관계로 받아들이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믿어져야 합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스스로 믿음으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말씀을 통하여 일하시는 성령님은 그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가려면 그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잠시 인격적 관계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죄악된 본성을 지닌 우리는 곧 세상에서 받았던 열등감을 보상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이제 첫 걸음을 뗀 정도인데도, 스스로 결승선을 이미 지난 것처럼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지 않고, 고양된 감정 중심으로 신앙을 붙들려고 하면, 그는 예수님을 말씀으로 믿었다가도 다시 말씀을 믿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반복된 혼동 속에서, 예수님은 다시 자신의 수단이 되어버리고, 그는 스스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보다 내가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할 자가, 잠시 믿어진 은혜를 과장하여 다시 스스로를 높이는 옛 사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보다 스스로를 크게 여기는 사람의 삶이 왜 고달프며 평안이 없을 수밖에 없는지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지셨던 멍에와 짐, 곧 온유와 겸손을 지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권하신 것입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28-3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