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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가 메마름

정서가 메마름

18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가 7장 18절

우리 중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어느 순간 내 행위와 결단을 신뢰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결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이 우리를 향해 변함없이 베푸시는 사랑과 인애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 부분을 오래 놓쳤습니다. 스스로는 사랑이라고 믿었던 말과 행동이 실상은 교묘한 포학이었음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주실 때,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타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급하게 다그치고, 판단하고, 군림하는 마음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사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제 기준과 열심으로 사람을 끌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결국 ‘내가 옳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자의 특징은, 시간이 갈수록 사랑이 식어가고 정서가 메말라 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날카로워지고, 분별이라는 이름으로 판단이 많아지고,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상대를 상하게 합니다. 말씀을 사용하지만, 주님의 온유와 오래 참음이 배제되어 있어 돌멩이처럼 무겁고 차갑습니다.

이런 모습은 결국 자신을 향한 주님의 너그러움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강박적이고 편집적인 마음으로, ‘뜨거움’이라고 착각했던 냉혹함 속에서 오래 지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가족도, 교회도 아프게 했음을 인정합니다.

사람은 강포함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실을 외면하고, 억하심정에서 나오는 눈물을 영적 감동으로 착각하며, 말씀을 휘두르는 미련함 속에서 헤맸습니다. 사명감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고취하며, 들여다보지 말았어야 할 가시밭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제게 필요한 경험이라면, 잘못된 길 안에서도 저를 보호하시며 심히 아파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게 완벽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제 기준으로 나를 만들어가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합니다. 전쟁 무기를 농기구로 바꾸어 유익을 주시는 주님께서, 저 같은 방해꾼을 통해서도 누군가에게 유익을 주셨겠지만, 제로 인해 겪어야 했던 고역을 생각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죄송함과 회개가 올라옵니다.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도행전 9장 4절

이 말씀 앞에서 마음이 무너집니다. 주님은 우리가 넘어진 자리에서조차 우리를 다시 일으키시며, 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시고 인애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서 다시 사랑을 배우고, 다시 부드러운 심장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