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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마주할 때 (4편)

성경을 마주할 때 (4편)

성경은 다수결에 의해서 해석되는 내용의 책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책이기에, 성령으로 주님 안에서 정당하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성경을 읽는다면, 66권의 성경이 서로 상응하며 어느 하나도 유별나게 다른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개혁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즉 ‘전성경적 이해’로 우리에게 계승시켰습니다.

66권의 성경만이 성경으로 들어오고, 그 외는 성경이 아니라고 판가름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보다 먼저 믿었던 믿음의 선배들이 성령 안에서 이 밖의 성경인 척하는 책들의 이상함을 함께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66권의 성경만이 서로 같은 주파수의 공명을 일으키며, 어느 한 권이 성경들 가운데서 유달리 구별된 것처럼 혼선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에 기록된 전도서의 말씀도 지혜자(전도서의 맥락으로 볼 때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의 말씀들이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목자’에게서 나온 바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 구절들도 성경의 기록자나 복음의 전파자의 배후에 한 하나님, 한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성경 66권 각각의 배후에 진짜 저자이신 하나님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교회 공동체 신앙교육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이 매우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저기는 저 말을, 여기는 이 말을 하며 개개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은, 현대 신학적 토양이 어떤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일부 ‘권위 있는’ 학자들이 내놓은 교묘한 이론은, 어느 성경이 유달리 구별되어 우리에게 독특한 교리를 추천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바울의 새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보적 칭의론’이라고도 합니다.
과거에는 알미니안주의, 펠라기우스, 반(反)펠라기우스, 웨슬리의 예지예정 등, 사람의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에 있어 사람의 행위를 조금이라도 혼합시키려는 행위구원/신율법주의적 시도와,
하이퍼칼비니즘이나 칼바르트의 화해론처럼 구원에 대한 인위적 논리에 지적 동의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방종주의적·반율법주의적 논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교적 쉽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지만, 잘 사그라들지 않는 ‘바울의 새관점’은 특별히 바울의 서신을 원어·구문론적 접근으로 해석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특징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장 15-16절

바울의 글들은 무식하게 인위적으로 풀 때 정당한 성경적 교리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식’이란 성경 전체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는 무식입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나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집중받는 데에 심취하여, 원어 해석의 수준이나 현학적 거드름으로 사람들에게 으스대며,
그 결과 성경의 정당한 교리에서 벗어나 바울의 서신을 왜곡되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바울의 새관점은 ‘유보적 칭의론’입니다.
즉, 정말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구원의 조건에 상응하는 또 다른 ‘성경적 고상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정당한 신앙은, 자녀의 권세를 받은 이후에 우리에게 ‘성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화란 구원을 받은 이후의 삶의 변화입니다.

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6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하박국 2장 4-6절

그러나 유보적 칭의론의 성화는 ‘칭의를 위한 성화’입니다.
간단히 말해, 건전한 신앙은 ‘칭의에 의한 성화’이며, 불건전한 신앙은 ‘칭의를 위한 성화’입니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의 글들을 복잡하게 읽고, 학자 자신들의 난독증으로 생긴 오해를 독특한 ‘학문적 발견’으로 포장하여,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시켜 추종자로 삼는 것입니다.
위 하박국의 말씀처럼, 자기 소유 아닌 것(사람들)을 자기 것처럼 모으는 강박에 정욕적으로 함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만족될 만한 ‘의로움’은 유한한 사람이 결코 이룰 수 없는 무한한 요구치가 있습니다.
구원은 한 번 죽음이 정해진 인생이, 한평생 신화적인 도덕률을 지니고 살아간 뒤에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구원에 충분할 정도의 ‘선(善)’에 충족되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죄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 없는 사람이 없으므로, 사람 중에는 구원에 충분한 선을 어떤 경위로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적당한 선함을 인정해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구원은, 반드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 외에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있는 의로움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무한한 의로움이, 믿음으로 전가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조차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믿음으로 전가된 것은 아들 예수님의 의로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행동으로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전제를 놓치면, 언제든 수많은 뱀들의 오묘한 혀에 현혹되어 그들에게 삼켜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얼마나 찌그러질지 알 수 없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고 욕심에 길들여져, 사람의 영혼을 탐닉하는 잔인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안전하다고 안일하면 내 가족이 위험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며 읽는 권리를 타인에게 쉽게 양도하지 마십시오.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장 30-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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