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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마주할 때 (2편)

성경을 마주할 때 (2편)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사도행전 17장 28-29절

성경은 죄에 기인한 인간의 본원적 모순에서 비롯된 의문을 들이대는 접근을 거부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명시적으로 죄인이라 지목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오류가 있고 스스로도 믿을 만하지 않다는 객관적 자각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변덕과 모순을 품고 산다는 사실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품은 채로는 성경을 정당하게 다루기 어렵습니다.

막연한 인생에도 하나님이 두신 질서가 작동하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흐릿하게나마 진실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불투명하고 모호한 상념을 꺼내어 씻어 주며, 해야 했으나 하지 못했던 생각을 선물하기 시작합니다. 왜 인간에게 정복 불가능한 오류와 의문이 있는지, 수많은 의문 가운데 반드시 해소해야 할 의미 있는 의문은 무엇인지, 왜 그러한 의문이 시시때때로 마음에 돋아나는지 분별하게 합니다.

위 말씀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풀리지 않는 실존의 문제로 인해 조물주, 섭리자에 대한 모종의 인식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이 인용하듯 사람은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곧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이십니다. 하나님이 조물주시요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존재의 기원을 모순 없이 명시하는 책이 성경입니다.

세상 모든 책 가운데 성경만이 온 세상의 시작을 정당하게 다룹니다. 고대 신화들은 신들을 피조 세계의 일부로 묘사하거나 피조물을 재료로 삼아 존재하게 하지만, 성경은 시간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 피조물보다 크신 조물주를 증언합니다. 시간의 차원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고차원적 묘사는 고대 신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보다 크시다는 기록을 따라 읽으면,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마지막에 지음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 이전에 지음 받은 모든 것이 인간이 땅에 발 붙여 살도록 준비된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맞기 위해 집을 정돈하고 필요를 미리 갖추듯,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사람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작은 인간의 강함을 역설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는 고백이 여기에 합당합니다.

이 연약함을 자각하고, 인간에 대한 자아도취적 신뢰와 교만에 대한 미련을 버릴 때에야 성경에 정당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인간은 강하지 않으며,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 1인분도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깨닫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자녀 되게 하시려 회개로 이끄십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모순에 대한 자각, 곧 회개가 전제될 때 성경이 비로소 받아들여야 할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이 인간의 모순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대상이 아니라 창조주를 바르게 알게 하는 계시임을 밝히며, 시간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자각하고 회개할 때에만 성경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결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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